삼성 이병철 회장 세 아들 ‘왕자의 난’
장남 이맹희,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차남 이창희 부친 탄원서 보내..
삼남 이건희 아버지에게 인정받아..

사진 =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사진 =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세계적인 기업이자 국내의 대표 그룹 삼성전자가 현재의 위치까지 성장한 데는 이건희 회장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어떻게 위에 있던 두 형을 제치고 셋째 아들인 이건희가 삼성 후계자로 회장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었을까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은 1976년 9월 암 수술받으러 일본으로 떠나기 전 세 아들을 불러 가족회의를 열었습니다. 이병철은 이때 장남 이맹희, 차남 이창희를 건너뛰고 막내아들인 이건희를 후계자로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성의 후계자가 장남이 아닌 셋째 아들인 이건희로 정해진 이유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서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아들 이맹희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사진 =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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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당시 삼성그룹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이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일본 미쓰이그룹에서 사카린 약 55톤을 밀수했다가 적발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공업과 대구대학을 정부에 헌납하고 경영 은퇴를 선언합니다.

이 밀수는 장남인 이맹희가 진두지휘했지만, 법적 책임으로 처벌은 둘째 이창희가 받고 감옥에 들어가 1년 만에 풀려났습니다.

한편 장남 이맹희가 삼성그룹을 2년간 이끌던 중 이병철 회장에게 밉보이며 후계구도에서 밀려나게 되고 1968년 이병철 회장이 삼성그룹 경영에 복귀합니다.

 

둘째 아들 이창희 "아버지 이병철 복귀에 탄원서.."

사진 =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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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는 출소한 차남 이창희가 정권 인사와 손을 잡습니다.

1969년 그는 부정한 일을 저지른 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그룹에 복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영원히 손을 떼야 한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하는 행위를 오히려 비난하며 탄원서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병철 회장은 크게 분노해 이창희 씨에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귀국하지 말라’며 미국으로 보내버렸습니다.

두 아들의 잘못된 행동에 1973년 이병철 회장은 “인가 후계 구도가 내막적으로 정해질 때, 맹희도 안 되겠고 창희도 안 되겠다. 건희 네가 해야 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셋째 아들 이건희 "반도체 사업과 아버지의 인정"

사진 =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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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은 형들의 바르지 못한 행동에 어부지리로 후계자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집안에서 이건희의 성격이 고분고분하지 못하고 사교적이지 못하니, 기업가로선 맞지 않다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명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건희는 스스로 능력을 이병철 회장에게 보여줌으로써 하나씩 계열사 경영을 물려받아 1979년쯤엔 확실한 후계자로 지목됐습니다.

이병철 회장이 셋째 아들인 이건희의 능력을 확실히 보게 된 것은 한국반도체 인수였습니다. 이건희는 이병철 회장에게 1974년 1월 설립된 한국반도체 인수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건희는 그해 12월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했습니다. 미국 실리콘밸리를 50여 차례나 드나들며 반도체에 매달렸습니다.

그의 모습을 본 이병철 회장은 1977년 삼성이 한국반도체의 나머지 지분을 인수하도록 했고 1978년 사명을 삼성반도체 주식회사로 변경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 1위를 달리는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의 시초가 됐습니다.

 

이병철 회장이 실패한 사업 "자식(아들) 농사"

사진 =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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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79년 2월 이건희는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했습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삼성 후계자가 되었음에도 후계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여자 문제, 마약 중독, 괴팍한 성격 등 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돌자 이건희 부회장은 혼외 자식 소문을 잠재우려 막내 이윤형(2005년 사망)을 낳은 뒤 정관수술을 했다는 것을 인터뷰에서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이러한 괴소문이 장남 이맹희의 짓이라고 판단하여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시도하여 이맹희의 집에 괴한이 들이닥쳐 집기류를 실어내기도 했습니다.

이에 장남 이맹희 명예회장은 평생 아버지를 피해 은신하며 살다 2015년 중국 베이징에서 결국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사진 =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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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왕자의 난’으로 이병철 회장의 눈 밖에 난 이창희는 삼성을 떠나 홀로서기를 시도하며 비디오테이프 사업으로 이름을 알리던 새한미디어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하지만 1991년, 야심을 전부 실현하지 못하고 58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아들인 이재관 부회장이 1997년 새한그룹으로 출범시켰으나, 과도한 사업확장에 IMF 금융위기까지 덮쳐 새한그룹은 속절없이 쓰려졌습니다. 결국 2000년에 워크아웃을 신청했고, 계열사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새한그룹은 몰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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